[Korea] Preparation for EXPO 2012 Yeosu Korea in Full Sw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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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Preparation for EXPO 2012 Yeosu Korea in Full Swing!

Date 02/10/2012

After years of careful planning and construction, the venue for Expo 2012 Yeosu Korea is finally taking shape. The Expo is slated to take place from May 12 to August 12 in Yeosu, Jeollanam-do under the theme of “The Living Ocean and Coast.”

One of the major features at Expo 2012 Yeosu Korea, the “Big-O” will host large-scale events, cultural programs, multimedia shows, etc.

The old cement storehouse will transform into the 55-story Sky Tower, with a pipe organ on the exterior, and an observatory on top.

The largest yet in Korea, the Aquarium will present Beluga whales, Baikal seals, sea dragons, and other rare ocean creatures.

The MVL (Most Valuable Life) Hotel, overlooking Port of Yeosu, will accommodate VIPs from abroad.

The International Pavilion, the largest exhibition hall onsite, will host 106 national pavilions.

The Corporate Pavilion will showcase the past and the future of shipping, marine, IT and green growth industries. Participating companies include Hyundai Motor, Samsung, LG, and four others.

More Info


Expo 2012 Yeosu Korea

Period: May 12 – August 12, 2012
☞ Venue: New Port Area, Yeosu-si, Jeollanam-do
☞ Homepage:
Expo 2012 Yeosu Korea (Korean, English, Japanese, Chinese, Fren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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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Beautiful Port City Surrounded by Numerous Islands

1330 tt call center: +82-61-1330 (Korean, English, Japanese, Chinese)

Courtesy of Expo 2012 Yeosu Korea Organizing Committee

Source: visitkore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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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솔산 전투"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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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솔산 전투" 개요

 

이 전투는 UN군이 중공군의 5월 대공세를 저지하고 반격작전을 펼치던 1951년 6월 4일부터 휴전회담이 시작된 동년 7월 10일까지 중동부전선의 미 해병 제1사단에 배속된 한국 해병 제1연대가 '양구'의 북동방 25km에 위치한 '대암산', '도솔산' 및 '대우산'을 연하는 1,000m 이상의 고지군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이 전선의 전략적 요충지인 '해안분지'(Punchbowl)를 고수하기 위하여 완강히 저항하는 북한군 제12사단을 혈전 끝에
격멸시키고점령한 공격전투이다.
 
중공군은 1951년 4월 22일, 수도 서울을 세번 째 탈환할 목적으로 참전이래 최대 규모의 전투력을 투입하여 4월 공세를 펼쳤으나, 오히려 막대한 손실만 입고 실패하게 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하여 1개 월도 안 된 5월 16일 주공을 '양구'-'인제' 방면에 집중 투입하여 이른바 5월 대공세의 포문을 열었다.
 
중공군의 공세 초기에는 미군에 비하여 전투력이 약한 한국군의 방어지역을 집중 공격함으로써 '현리' 일대에 종심 깊은 돌파구를 형성하였고, 또 선두부대의 일부는 '속사리'(DS 56 65)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할 수록 그들의 병참선이 연장됨에 따라 전투력도 한계에 도달하였고 반면에 UN군의 방어력은 강화되었다.
 
이로 인하여 중공군의 5월 대공세는 공격 개시 1주일 만에 778고지(Bunker 고지) - '한계, - '풍암리' - '속사리' - '주문진'을 연하는 선에서 일단락되었다.
 
이를 계기로 다시 주도권을 장악한 미 제8군은 중공군이 철수할 기미를 보이자 5월 23일부터 즉시 공세작전으로 전환하였으며, 이 작전에서 미 제10군단은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고 5월 말에는 4월 공세 이전의 '화천'저수지 - '양구' - '원통'선까지 진출하였으며 우인접 한국 육군 제1군단도 '간성'까지 진출하는 등 전군이 Kansas선을 재확보하였다.
 
UN군측은 전쟁 전의 현상을 회복하게 되자 다시 본격적으로 공산측과 휴전협상을 모색하는 한편 군사작전을 Kansas선의 유지를 위한 국지적인 공격작전으로 전환하엿다.
 
이때 미 제8군은 휴전협상 과정에서 Kansas선을 주저항선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그 북방에 비무장지대의 설치와 경계부대를 운용할 공간을 고려하여 현 방어선을 북쪽으로 최소한 32km 추진시켜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중부전선에서는 '철의 삼각지대' 저변에 있는 '철원'과 '김화', 그리고 '금성'분지를 제압할 수 있는 지형을 확보하도록 하였고, 중동부전선에서는 중공군의 전략적 요충지인 '해안분지'를 감제하고 또한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기 위해 Kansas선을 '화천'저수지 - 1304고지(DT 230305) - '산두머리곡산'(DT 373379) - '향로봉'(DT 406423) - '고성'을 연하는 선 (New Kansas선으로 명명)으로 북상, 조정하고 이를 점령하도록 하였다.
 
이 조치에 의거 미 제10군단장 알몬드(Edward M. Almond) 중장은 6월 1일 좌전방 미 해병 제1사단(한국 해병 제1연대 배속)은 '서화리'를 목표로 각각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반면 5월 대공세에서 참패당한 중공군은 겨우 접적만 유지하면서 분산, 철수한 주력부대가 재편성할 시간을 얻기 위하여 '화천저수지' 북 쪽의 '북한강' - '양구' - '원통'을 연하는 고지군에 북한군 제2 및 제5군단을 배치하고 험준한 지형을 이용,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끝까지 고지를 사수하도록 독려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미 해병 제1사단은 최초 '무명도로'(31번)를 중심으로 좌전방에 미 해병 제1연대, 우전방에 미 해병 제5연대를 배치하고 미 해병 제7연대를 '도촌리'(DT 1513), 그리고 한국 해병 제1연대를 '죽리'(DT 1113)에 예비대로 확보한 가운데 항공 및 포병의 화력지원하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미 해병 제1사단의 공격은 5월 하순에 있었던 반격작전 시의 상황과는 양상이 판이하게 달랐다. 북한군은 고지마다 거점진지를 구축하고 완강하게 저항함으로써 초전부터 고전이었고, 또한 우인접 미 육군 제2사단의 공격 역시 같은 상황이었다.
 
미 제10군단장은 작전초기부터 공격이 부진하자 사단 전투지경선을 조정하고 공격부대의 전투 편성도 변경시켰다. 좌전방 '화천저수지' 남 쪽에는 군단 예비대로 있던 한국 육군 제7사단을 투입하고 그 동안 군단 우전방에서 혈전을 벌인 미 제2사단은 그 작전지역 중 '서화리' 계곡 좌측을 좌인접의 미 해병 제1사단에, 그 우측을 동사단에서 배속 해제된 한국 육군 제5사단에 인계함과 동시에 예비대로 전환시켰다.
 
미 해병 제1사단은 이 조치로 사단의 전투 정면이 동 측으로 확장되자 6월 3일 사단작전지역 내에서 가장 험준한 지역으로 진출 중에 북한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많은 전, 사상자가 발생한 미 해병 제5연대를 '서화리'계곡 좌측으로 이동하도록 하고 대신에 이 지역에는 '죽리'에서 예비대로 대기 중인 한국 해병 제1연대를 투입하였다.
 
한국 해병 제1연대는 '화천'저수지 남쪽의 '수리봉'(DT 0619 ) 일대의 진지를 한국 육군 제3연대에 인계하고 '죽리'에 집결한지 이틀 만에 다시 '광치동'(DT 1721)으로 이동하여 미 해병 제5연대의 진지를 인수하게 되었다. 이로써 양구 북동방 '대암산' - '도솔산' - '대우산'을 연결하는 험준한 고지에서 예측불허의 혈전이 펼쳐지게 되었다.

                                    "도솔산 전투" 당시의 해병 제1연대장 김대식 대령(제3대 해병대 사령관)과 그의 휘호
 
한. 미 해병 연대가 진지 교대를 하고 있을 무렵까지도 미 해병 제5연대의 상당수 부상자들이 현지에서 하산을 기다리고 있었고 주변에는 미처 처리하지 못한 피아의 전사자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이런 상황에 의거 짐작하건대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 전투"에서 많은 실전 경험을 쌓은 한국 해병 제1연대라 할지라도 이번 작전이 그리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견할 수 있었다.
 
                                            '도솔산'지역도(강원도 얀구군 해안면 만대리 분지, Punchbowl)

위의 '도솔산' 지역도 중앙에 빨간색 원과 옆에 1951.6.7로 표시된 지점이 목표 #4의 중간목표인 '무명고지'이며 제2중대 3소대가 당일(6월 7일) 20:00사경에 점령하였음.
                                                                        해병 제1연대의 공격목표 상황도
위의 '목표점령도' 중 목표 #4 밑의 빨간 표식(무명고지)이 제2중대 3소대(소대장 이근식 소위)가 공격 2일째인 6월 7일 20:00시경 3회에 걸친 돌격으로 점령한 지점임.
 
미 해병 제1사단으로부터 능선 상에 위치한 크고 작은 24개 고지를 공격목표로 활당받은 한국 해병 제1연대는 좌전방 제1대대에 목표 #1, #2, #4, 및 #7을, 우전방 제2대대에 목표 #8, #9, 및 #10을 각각 부여하고 제3대대를 예비대로 '광치동'에 확보한 가운데 6월 4일 14:00시 공격을 개시하였다.
 
공격부대는 항공 및 포병의 화력지원하에 경미하게 저항하는 북한군을 격멸하고 최초목표인 #1, #8을 쉽게 탈취한 후 공격의 여세를 몰아 목표 #2 및 #9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북한군이 최초목표에서 철수한 병력까지 수용하여 완강하게 저항할 뿐 아니라 일몰로 인하여 공격부대는 공격을 일시 중지하고 목표 #1 및 #8로 철수하여 야간방어로 전환하였다.
 
다음 날(5일) 공격부대는 돌격중대를 교대시킨 후 재공격을 감행하였으나 지형도 감제당하여 불리할 뿐만 아니라 완강한 적의 저항으로 다수의 사, 상자만 내게 되어 공격은 돈좌되었다. 이에 연대장 김대식(제3대 해병대 사령관) 대령은 돌격부대 정면의 적의 전투력을 분산시켜 활로를 타개하기 위하여 예비대인 제3대대를 우측방으로 투입하여 목표 #6, #13, #12 및 #11 순으로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기도 역시 실패하였다. 이때 미 해병 제1사단장 토마스(Gerald C.Thomas) 소장은 사단 전 정면에서 북한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공격이 부진하자 6월 8일 사단 예비대로 '도촌리'에서 대기 중인 미 해병 제7연대(-제3대대 )를 미 해병 제1연대와 한국 해병 제1연대의 전투지경선인 '무명'(31번)도로 축선 상에 투입하였다.
 
이후 한국 해병 제1연대는 목표 #4, #9 및 #13을 탈취하기 위하여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던 중 제7중대 1개 소대가 돌격하여 목표 #9를 점령하기도 하였으나 애석하게도 중대의 주력병력이 증원되기 이전에 적의 역습으로 동고지로 진출한 소대원 10여 명이 전사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도솔산' 지형과적진으로 돌입하는 해병
 
이와 같이 한국 해병 제1연대의 공격은 불운하게도 고비 때마다 잦은 비와 산악 특유의 농무로 인하여 화력지원, 특히 항공지원이 제한되었고 또 유일한 능선접근로를 통한 정면돌파 만 반복함으로써 전사, 상자가 급증함에 따라 공격 의지마저 약화되어 해병들의 사기는 몹시 저하되었다.
 
후일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목표 #4, #9 및 #13을 연하는 선은 북한군 제12사단의 주저항선으로서 적은 1개 연대규모로 동 거점을 고수하기 위하여 진지 전방에는 수많은 지뢰를 매설하였고 또 기암, 괴석의 공간을 이용하여 경기관총을 배치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진지와 진지는 교통호로 연결하고 이 지역을 난공불락의 요쇄진지라고 호언장담하고 있었다.
 
이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해병 제1연대는 6월 10일 오후에 연대장과 연대참모가 동석한 가운데 긴급 작전회의를 개최하여 그 동안의 작전경과와 실패 원인을 면밀히 분석, 검토한 결과 야간공격을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미 해병 제1사단장은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한국 해병 제1연대장의 결의에 찬 집요한 건의에 반신반의하면서 야간작전을 승인하였다. 연대 전 장병들은 야간공격의 승패가 곧 연대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비장한 각오하에 공격준비를 완료하고 6월 11일 02: 00시에 이미 여러 차례 치른 작전으로 눈에 익은 지형을 따라 무조명, 무지원하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공격부대는 예상 외로 적의 큰 저항을 받지 않고 순조롭게 진출하여 공격개시 3시간이 경과할 무렵에는 목표 #4에 이어서 목표 #9 에서 목표 점령을 알리는 신호탄을 새벽 하늘에 쏘아 올렸다. 연대로서는 북한군이 난공불락이라고 호언장담하던 목표 #4, #9 및 #13을 연하는 주저항선 돌파가 이렇게 쉽게 성공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하였다.
 
이때 북한군 제12사단은 그들의 주전술인 야간공격을 해병 제1연대가 사용할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못한 결과 일부 병력만 경계부대로 배치하고 주력은 후방 능선으로 철수 중에 불의의 일격을 받았던 것이다.
 
목표의 점령으로 사기가 충천된 해병 제1연대는 비로서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한 후 전과확대를 위한 추격작전을 실시하여 경미하게 저항하는 북한군을 격퇴하고 목표 #7 및 #10을 점령하였다.
 
6월 12일에는 우전방 제3대대만 계속 공격을 재개하여 목표 #12, #11 및 #14를 점령하였고, 제9중대 1개 소대는 목표 #15인 '대암산'으로 진출한 우인접 미 해병 제5연대와 연결함으로써 새로운 Kansas선 내의 16개 목표를 완전히 점령하고 13일 작전을 일단락지었다. 연대는 즉시 방어로 전환하여 제1대대를 목표 #2, #4 및 #7에, 제2대대를 목표 #9 및 #10에, 그리고 제3대대를 목표 #11 및 #14에 각각 배치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한편 북한군 제12사단은 해병 제1연대의 끈질긴 공격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주저항선에서 철수하여 '도솔산' 일대에 축차진지를 편성하고 진지보강에 주력하고 있었다. 이 무렵 연대의 우인접에서 새로운 Kansas선으로 진출한 미 해병 제1연대장 브라운 (Brown) 대령이 동 연대의 방어선이 북한군의 주요 거점인 757고지(DT 109254)에서 감제되고 있으므로 주저항선을 3~4km 북상시킬 것을 건의하였다. 미 해병 제1사단장은 이 건의를 검토한 결과 미 해병 제1연대 전방의 757고지와 한국 해병 제1연대 전방의 '도솔산'을 연하는 Brown(후일 New Kansas선에 포함됨)선을 설정하고 이 선을 점령하도록 하였다.
 
이 명령에 의거 한국 해병 제1연대 제2대대는 6월 15일 08:00시 목표 #17, #18 및 #19를 향해 공격을 개시하여 산발적으로 저항하는 적을 격퇴하고 목표를 점령 후 적의 역습에 대비하여 진지강화와 정찰활동에 주력함으로써 "도솔산 공격"의 발판을 확보하였다. 이어서 제3대대가 "도솔산 공격"을 준비하고 있을 때 대대를 방문한 김대식 연대장은 지난 6월 초부터 감행된 이 전투를 이번에 공격할 고지의 이름을 따서"도솔산 전투"라고 명명한다고 하여 당면한 전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대대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제3대대가 6월 17일 08:00시에 공격을 개시하자 북한군은 대대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무수한 박격포를 사격하며 완강히 저항하였다. 그러나 대대는 이에 굴하지 않고 두더지 처럼 교통호를 파면서 적진에 접근한 후 야간공격을 감행하여 6월 19일 새벽 '도솔산'을 점령하였다.
 
제3대대가 중앙에서 주변고지를 감제할 수 있는 '도솔산'을 확보하자 맨 마지막으로 공격준비를 완료하고 명령만 기다리던 제1대대가 6월 19일 08:00시 제3대대의 엄호하에 '도솔산' 좌측방으로 뻗은 능선상의 목표 #23을 공격하여 점령한 후 이미 목표 #24로 진출해 있는 미 해병 제7연대와 연결하고 동 고지를 인수함으로써 해병 제1연대는 작전 개시 16일 만에 '해안분지'를 남쪽에서 감제, 관측할 수 있는 '도솔산' 일대의 고지군을 확보하였다.
 
이 무렵 한국전쟁 발발 1주년을 맞이하여 그 동안 UN군측의 여러차례에 걸친 평화제의를 거부해 온 중공군측이 소련 외상 말리크(Malik)를 통해 휴전을 제안해 옴으로써 협상개시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전장은 7월 초까지 소강상태로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 기간 중 북한군은 밤만 되면 소규모 부대를 침투시켜 주저항선에 대한 탐색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때 목표 #24를 방어 중이었던 제3중대는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한 때 주저항선의 일부가 점령당하는 위기 상황을 맞기도 하였으나 포병의 화력지원과 우인접 제2중대와 협조된 공격을 펼쳐 이들을 격퇴하였다.
 
이때 UN군측도 휴전협상이 열리기 전에 방어선을 엄호할 수 있는 중요한 정찰기지를 확보하기 위한 작전을 펴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미 제10군단장은 예하 사단에 Kansas선 전방에 설정된 정찰한계선인 Badger선내에 강력한 정찰기지를 설치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명령에 따라 해병 제1연대는 눈 위의 혹처럼 연대의 작전지역을 감제, 관측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해안분지'를 서쪽에서 통제할 수 있는 '대우산'을 공격목표로 결정하였다.
 
해병 제1연대는 7월 8일 10:00시에 공격준비 사격을 실시한 후 제5, 제7, 및 제10중대로 혼성편성된 공격부대를 제2대대장의 지휘하에 공격을 개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공격부대가 적진으로 진출할 수록 적의 박격포 사격을 동반한 저항은 예상외로 완강하였고 특히 진지 전방에서는 발을 옮길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지뢰가 매설되어 있어 전진이 지연됨은 물론, 이로 인한 사상자가 급증하였다. 설상가상으로 기상의 악화로 항공기 및 포병의 화력지원마저 여의치 못하여 공격은 돈좌되었다.
 
후일 밝혀진 바에 의하면, 연대 정면의 북한군 제5군단은 해병 제1연대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받고 재편성이 불가피한 북한군 제12사단을 7월 초순의 소강상태를 틈타 예비대로 전환시키고 대신 부대 정비를 완료한 그들의 제32사단을 '대우산' 일대에 투입하고 진지를 보강하기 위해 수많은 지뢰를 매설하였다.
"도솔산 전투" 후 해병 제1연대로 현지를 방문하신 이승만 대통령과 김대식 연대장(철모)사진 우측부터:손원일 해군 참모총장, 무치오 미국 대사, 밴프리트 미 제8군 사령관(연대장 뒤)
                                   "도솔산 전투" 후 현지(해병 제1연대)를 방문하신 이승만 대통령께서 내리신 휘호.
 
해병 제1연대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이번에는 제1대대를 투입하여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완강히 저항하는 적을 공격하였으나 '대우산'과 주저항선 사이에 위치한 1100고지와 1001고지를 연하는 선에서 공격이 저지되었다.
 
연대가 재공격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인 7월 10일 해병 제1연대의 상황을 지켜본 미 해병 제1사단장은, 불굴의 공격 정신으로 무장된 한국 해병 제1연대라 할찌라도 적의 저항이 완강한데에다가 또한 연대가 그 동안 혈전을 펼쳐 지쳐있으므로 계속 공격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차후작전을 위해 일단 공격을 중지하고 현 위치에서 방어에 주력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명령에 의거 한국 해병 제1연대는 '도솔산'을 중심으로 한 주저항선의 진지보강과 전방지역에 대한 정찰활동을 계속하였다.

이와 같이 정찰기지 확보작전이 부진하자 미 제10군단장은 7월 15일에 지난 6월부터 '양구' 북방에서 북한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펼친 미 해병 제1사단을 군단예비대로 있던 미 제2사단과 교대시켰다. 이에 따라 그 동안 미 해병 제1사단에 배속되어 연대 창설 이후 가장 치열한 혈전을 치른 한국 해병 제1연대도 용맹한 해병의 피의 대가로 얻은 '도솔산' 방어지역을 미 제2사단에 인계하고 '홍천' 북방의 '북창'(DS 1282) 부근으로 이동하여 부대정비와 교육훈련에 주력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1. 海兵戰鬪史 "第一輯"(海兵隊司令部)
              2. 韓國戰爭 戰鬪史 "兜率山戰鬪"(國防軍史硏究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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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출마 선언' 박근혜 "어머니가 흉탄에 돌아가신 뒤 완전히 다른 길을 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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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출마 선언' 박근혜 "어머니가 흉탄에 돌아가신 뒤 완전히 다른 길을 가야 했다"

최연진 기자

2012.07.10 11:50

새누리당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10일 오전 서울 영등포 타임스퀘어 광장에서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있다. /뉴시스

 

박근혜 새누리당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10일 대권 도전을 공식 선언했다. 2007년에 이은 두 번째 대권 도전이다.
 
박 전 비대위원장은 10일 오전 서울 영등포 타임스퀘어에서 “국민 여러분의 아픔을 같이 나누고 함께 해결하면서 국민 모두가 각자의 꿈을 이룰 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저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18대 대선에 도전한다고 밝혔다.
 
박 전 비대위원장은 “어머니가 흉탄에 돌아가신 후 제 삶은 완전히 다른 길을 가야 했다”며 “각계각층 국민을 만나고 국민의 애환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국민이 곧 어머니였고 가족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를 잃는 고통과 아픔을 겪은 뒤엔 평범한 삶을 살고자 했지만, 국민의 땀과 눈물로 이룩해 온 나라가 무너지고 국민이 고통받는 모습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며 출마 배경을 설명했다.
 
박 전 비대위원장은 국정운영의 기조를 국가에서 국민의 삶과 행복으로 바꾸겠다며 ▲경제민주화 ▲일자리 창출 ▲복지확대를 최우선 3대 핵심과제로 제시했다.
 
그는 “투명한 시장경제 질서를 확립해 경제민주화를 실현하는 일은 시대적 과제”라며 “정당한 기업활동은 보장하되 불필요한 규제는 철폐하고, 향력이 큰 기업일수록 책임을 다하도록 하는 정부를 만들 것”이라고 다짐했다. 또 ▲전통제조업의 고부가가치화 ▲서비스 산업의 경쟁력 제고 ▲문화·소프트웨어 산업 등 일자리 창출형 미래 산업 지원·육성 ▲아이디어 및 벤처 창업 활성화 ▲내수 중소기업 육성 ▲혁신기업·혁신기술 지속개발 등을 제시하며 “고용률 중심의 국정운영 체제를 구축할 것”이라고 밝혔다.
 
복지와 관련해서는 “생애 주기별 맞춤형 복지제도를 확립하겠다”며 “국민 개개인이 가진 자기 역량을 뒷받침하고 끌어내 자립·자활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경제와 복지의 선순환이 일어나게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 전 위원장은 이 같은 3대 핵심과제를 아우르는 국가발전 비전을 ‘오천만 국민행복 플랜’으로 명명했다.
 
교육분야 관련 공약으로는 “경쟁과 입시에 매몰된 교육을 ‘함께하는 행복교육’으로 바꿀 것”이라면서 “영유아의 보육·교육에 대한 국가지원 체계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안보에 대해서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강조하며 “국민적 공감대를 전제로 남북 간 신뢰와 국제사회의 협력을 바탕으로 안정된 남북관계를 모색하겠다”고 했다.
 
그는 또 “공개와 공유, 소통과 협력을 정부운영의 핵심원리로 삼아 정보를 독점하는 정부가 아니라 국민과 함께 정보와 지식을 공유하는 정부를 만들겠다”며 “정부 부처 사이에도 칸막이를 해소해서 모든 정보와 지식을 공유하고 공유된 정보는 투명하게 모든 국민에게 공개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박 전 비대위원장은 마지막으로 “그동안 정치를 해오면서 제게 손해가 되더라도 한 번 드린 약속은 반드시 지켜왔다.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는 일에는 정치생명을 걸고 싸워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강조하며 지지를 당부했다.

Source:  new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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