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2.07.16 해병대 개혁-무엇이 문제인가?
  2. 2012.07.16 해병대 얼짱 엘리트女 3총사, 사진 봤더니…
  3. 2012.07.16 림팩 2012 에 참가한 대한민국 해병대 장병들...
  4. 2012.07.16 대한민국 해병대, 창설 이래 첫 美 전지훈련 떠난다
  5. 2012.07.13 130회 도솔산 전투
  6. 2012.07.10 "도솔산 전투" 개요
  7. 2012.07.09 서부전선의 해병대

해병대 개혁-무엇이 문제인가?

|

                                                      해병대 개혁-무엇이 문제인가?

 

                             

                                                   50년 세월의 변화

 
아래 사진은 그때(1952년 8월 좌측 선임장교 우측 중대장, 필자)부터 50년이 지난 후에 찍은 사진으로서 50년 전의 우리와 그때부터 50년 후(2002년 11월)의 우리의 변화된 모습을 비교하여 보여주고 있음.

                                            
사진(첫째)은 1952년 7월 서부전선의 "장단 및 사천강지구 전투" 시 해병 제1연대 제2대대 제5중대장인 필자(해간 3기 우측)와 선임장교인 김을상 소위(해간 5기 좌측)와 함께 중대본부 천막 앞에서 찍은 사진(이때 제5중대는 대대예비대로서 좌일선대대의 주저항선 후방에 중대본부는 분대천막, 해병들은 개인천막을 치고 있었음)

 

아래 사진은 그때부터 50년 후의 우리의 모습(좌측 선임장교 김을상 소위 해간 5기, 중앙 중대장 이근식 중위 해간 3기 필자, 우측 김우근 소위 해간 5기 대대 작전보좌관)

 

해병 제1연대의 재배치  

 

1952년 3월 17일 미 해병 제1사단의 작전 통제하에 중동부전선(강원도 양구북방, Punch-bowl 일대)에서 북한군과 대치 중에 있던 해병 제1연대(연대장 김동하 대령, 부연대장 공정식 중령)는 미 해병 제1사단의 작전명령에 의거 서부전선(개풍군 장단면 일대)으로 이동하여 한국 육군 제1사단과 현지 교대하였다. 

 

부대배치는 우일선대대에 제1대대(대대장 남상휘 중령), 좌일선대대에 제3대대(대대장 한예택 소령), 연대예비대를 제2대대(대대장 박성철 소령)로하여 좌측대대 후방지역에 배치하여 중공군과 대치하였다. 이때 한국 해병대의 우측에 미 해병 제1사단이 배치되었다.

 

연대예비대인 제2대대는 좌측대대의 후방일대에 중대 단위로 분산배치하여 축차진지 공사를 시작하였다. 제5중대(중대장 하용수 중위)는 대대좌측 중대로서 중대본부는 분대천막, 해병들은 개인천막을 치고 '임진강' 강변일대의 야산(구능지역)에서 진지작업을 하고 있었다.

 

예비중대지역에 적의 포탄 낙하

7월 중순의 어느 날 아침 8시 전후하여 중대지역 일대에 중공군의 야포탄이 10여 발 낙하하였다. 그 중 1발이 중대본부 천막에 명중하여 여러명의 해병들이 전사, 상당했다. 바로 옆에 처있던 중대장 개인천막도 중대본부 천막과 함께 날라가 버렸다.

 

이때 중대장(이근식 중위 5월 중순에 부임)인 필자는 '임진강 철교'의 경계를 위하여 '임진강' 주변일대에 배치된 3소대의 경계근무 상태를 점검하기 위하여 중공군의 포탄이 낙하하기 약 10분 전에 Jeep로 진지를 출발하여 3소대 진지(임진강 철교)를 점검하고 있었다. 이것을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해병대 전투" 4: "사천강 전투"(제5중대의 불운)에서 설명되어 있음. 

                                    
위성사진설명:군사분계선(DMZ 황색)이 위성사진의 중앙을 남북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선 좌측(서쪽)은 중공군 진지지역, 우측은 해병대 진지지역이며 중앙에 흰색으로 보이는 지점이 '도라산'역, 그 북쪽에 검게 보이는 고지가 '도라산 전망대(155mm고지)'. 오른쪽을 '임진강'이 북에서 남으로(한강)흐르고 있으며 윗쪽의 교량은 '통일교', 밑의 교량은 '자유교'임.
                      
사진설명: '임진강'이 오른쪽에서 왼쪽(남쪽)으로 흘러 '한강'으로 유입되고 있으며 강 중간에 '자유교(경의선)'와 그 오른쪽에 '통일교'가 보이고 있음. 강('자유교') 너머의 도로를 중심하여 좌측 일대의 야산에 해병 제1연대가 배치되어 있었으며 도로 윗쪽의 오른쪽에 '도라산'역이 보이고 있으며 그 오른쪽에 '도라산'의 일부와 '도라산'역 및 주차장이 보이고 있음.
사진의 윗쪽에 '사천강'이 '도라산'역 북쪽에서부터 남쪽(왼쪽)으로 흘러 '임진강'으로 유입되고 있으며 이 강을 중심하여 서쪽에(윗쪽) 중공군이, 남쪽에 해병대가 각각 배치되어 있었음. 강 남쪽에 보이는 야산(강변)의 작은 구능이 해병대 전초진지였음.
                             
                                                                     3소대가 경계하고 있던 '임진강 철교'
 

 

제 5중대의 불운  

 

oldmarine

And

해병대 얼짱 엘리트女 3총사, 사진 봤더니…

|

해병대 얼짱 엘리트女 3총사, 사진 봤더니…

 

사관후보 96기 동기생, 나란히 여성 최초 영관 장교 진급 

 

2012.07.02 [월]

 

해병대 창설 63년 만에 처음으로 영관급 여성 장교가 탄생했다. 해병대는 김윤전(36)·한경아(34)·조윤정(35) 대위가 1일 각각 소령으로 진급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2001년 7월 사관후보생 96기생으로 해병대에 첫발을 내디딘 최초의 여군 장교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윤전 소령

  

해병대사령부 군수참모처에서 근무 중인 김 소령과 정보참모처의 한 소령은 임관 이후 해병대 장교교육대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하며 후배들을 양성하기도 했다.

한경아 소령


특히 김 소령은 2006년 해병대 여군 최초로 전투부대 중대장직을 맡기도 했다. 해병대 1사단 헌병대 수사과에서 근무하던 조 소령은 이번 진급으로 여단급 부대의 헌병대장직을 맡아 해병대 최초의 여성 헌병대장이라는 또 하나의 경력이 추가된다.

조윤정 소령


김 소령은 “영관급은 위관장교와 달리 합당한 전문지식을 갖춰야 하기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면서도 “육아와 일을 병행하기 어려워 아이들에게 좀 더 신경을 못 써 미안하다.”고 밝혔다. 한 소령은 “남자 군인보다 더 잘해야 한다는 기대를 충족시켜야 하기에 부담도 느낀다.”며 “군인으로서 초심을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장교 90여명과 부사관 120여명의 여군이 해병대에서 복무하고 있다.

하종훈기자 artg@seoul.co.kr

 

Source: seoul.co.kr

 

oldmarine 

And

림팩 2012 에 참가한 대한민국 해병대 장병들...

|

림팩 2012 에 참가한 대한민국 해병대 장병들...

 
2012-06-03 08:09:02
 

림팩 2012 훈련에 참가하기 위해 미 해군 상륙함 뉴올리언스 (USS New Orleans, LPD 18) 에 승선한 대한민국 해병대 장병들의 모습입니다.

 

마지막 2장의 사진은 참조용으로 뉴올리언스함의 모습이며, 이번에 승선한 해병대원들은 하와이까지 뉴올리언스함을 타고 이동한 후, 림팩훈련에 참가할 예정입니다.

 

아래사진들에서 해병대원들 관련 사진은 미해병대가, 뉴올리언스함 관련 사진들은 미 해군이 각각 제공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혹 이곳을 방문하시는 분들 중 아래 사진들에 등장하는 자랑스런 장병들의 친지분들이 계시면 반가운 마음으로 늠름한 모습을 확인하시면서 반가운 얼굴들 고화질/대용량 원본사진이 필요하신 친지분이 계시다면 댓글에 이메일 주소를 남겨주시면 보내드리겠습니다. 이곳 비밀에 사진용량 제한이 있어 부득이 사이즈를 줄여서 말이죠...

 

 

 

 

Source: bemil.chosun.com

 

oldmarine

And

대한민국 해병대, 창설 이래 첫 美 전지훈련 떠난다

|

대한민국 해병대, 창설 이래 첫 美 전지훈련 떠난다

 

2012-06-01 08:32:29

1개 소대 연합훈련.환태평양 훈련 등 2개월간 참가

【서울=뉴시스】오종택 기자 = 대한민국 해병대가 창설 이후 처음으로 두 달여간 미국으로 전지훈련을 떠난다.

해병대는 1일 미국 하와이에 1개 소대급(35명) 전투부대를 파견해 한미 연합 및 다국적군 연합훈련, 2012년 환태평양훈련(RIMPAC) 등에 참가한다고 밝혔다.

하루 전 출정 신고를 마친 훈련참가 장병들은 이날 포항에서 미 해병대 헬기(MH-53)를 이용해 해상에 대기하고 있는 미 상륙함 뉴 올리언즈(New Orleans)에 편승한다. 곧장 하와이로 이동한 후 6월10일부터 8월3일까지 55일간의 훈련일정에 돌입한다.

하와이에 도착한 해병대 장병들은 26일까지 미 해병대와 함께 하와이주 오아후섬(Oahu Island)에 위치한 해병대 훈련장에서 함께 훈련한다.

이들은 수색·정찰 및 기계화전투, 방어전투, 안정화작전 등 도시지역 전투훈련과 정글지역에서 수색정찰 훈련을 진행할 예정이다.

이어 27일부터 다음달 7일까지 미국·뉴질랜드·멕시코 해병대와 함께 한 개 중대를 이뤄 실시하는 다국적군 연합훈련에 참가해 중대급 전술훈련, 도시지역 전투, 헬기·상륙돌격 장갑차(AAV) 조난시 탈출훈련, 개인 및 공용화기 사격을 실시한다.

다음달 8일에는 미 상륙함에 편승, 하와이 빅 아일랜드(Big Island)에 있는 미 훈련장으로 이동한다.

이번 훈련에 참가한 호주·캐나다·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통가 해병들도 미 해병대와 다른 중대를 이뤄 한국 해병대와 같은 장소에서 동일한 훈련을 하게 된다.

2000m가 넘는 고지에서 다국적군은 야외에서 숙영과 식사를 하면서 소대기동훈련, 기동사격 등 전술훈련을 같은 달 23일까지 실시한다.

다국적군은 다음달 24일 미 상륙함정에 다시 편승해 8월2일까지 태평양 연안국 22개국이 참가하는 림팩훈련에 참가한다.

역대 최대 규모로 열리는 이번 림팩훈련은 녹색국과 황색국의 분쟁이 발생함에 따라 UN의 의결로 림팩군이 개입해 분쟁을 해소한다는 가상의 시나리오로 진행될 예정이다.

훈련간 한국 해병대 장병들은 림팩군의 일원으로서 상륙작전과 함께 비전투원 후송작전(NEO), 정글일대 수색 작전을 진행한다. 이후 모든 훈련을 마친 해병대는 해군 최영함을 이용해 23일 귀국할 예정이다.

2000년부터 참관인 자격으로 림팩훈련에 참가한 해병대는 미 태평양 해병대사령부의 훈련참가 요청에 따라 올해 최초로 소대규모의 병력을 파견해 미국에서 전지훈련을 하게 됐다.

김정훈(해사 56기) 대위는 "이번 훈련을 통해 전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연합작전을 펼칠 수 있는 능력을 입증해 대한민국 해병대의 우수성과 강인함을 각국에 알릴 것"이라며 "군과 해병대를 대표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엄정한 군기를 유지한 가운데 솔선수범하겠다"고 말했다.

 

Source: newsis.com

미해병대 헬기 탑승하는 해병대 장병들

 

2012.06.01 14:49

01/03

 

1일 해병대 창설이후 최초로 하와이에서 열릴 환태평양훈련(RIMPAC)에 참가하는 해병대 장병들이 포항 해상에 대기중인 미 상륙함 뉴올리언즈함에 편승하기 위해 미해병대 MH-53헬기에 탑승하고 있다. (사진=해병대 제공) /뉴시스

 

Source: photo.chosun.com

 

oldmarine

And

130회 도솔산 전투

|

130회 도솔산 전투
방송기간 : 2012/06/24 ~ 2012/06/30

 

 

 

해병대를 지칭하는 또다른 이름 무적해병. 대통령이 직접 하사했던 무적해병이라는 이름을 가져다 준 전투가 있다.

Source: kbs.co.kr

 

oldmarine

 

"도솔산 전투(兜率山戰鬪)"    

And

"도솔산 전투" 개요

|

"도솔산 전투" 개요

 

이 전투는 UN군이 중공군의 5월 대공세를 저지하고 반격작전을 펼치던 1951년 6월 4일부터 휴전회담이 시작된 동년 7월 10일까지 중동부전선의 미 해병 제1사단에 배속된 한국 해병 제1연대가 '양구'의 북동방 25km에 위치한 '대암산', '도솔산' 및 '대우산'을 연하는 1,000m 이상의 고지군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이 전선의 전략적 요충지인 '해안분지'(Punchbowl)를 고수하기 위하여 완강히 저항하는 북한군 제12사단을 혈전 끝에
격멸시키고점령한 공격전투이다.
 
중공군은 1951년 4월 22일, 수도 서울을 세번 째 탈환할 목적으로 참전이래 최대 규모의 전투력을 투입하여 4월 공세를 펼쳤으나, 오히려 막대한 손실만 입고 실패하게 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하여 1개 월도 안 된 5월 16일 주공을 '양구'-'인제' 방면에 집중 투입하여 이른바 5월 대공세의 포문을 열었다.
 
중공군의 공세 초기에는 미군에 비하여 전투력이 약한 한국군의 방어지역을 집중 공격함으로써 '현리' 일대에 종심 깊은 돌파구를 형성하였고, 또 선두부대의 일부는 '속사리'(DS 56 65)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할 수록 그들의 병참선이 연장됨에 따라 전투력도 한계에 도달하였고 반면에 UN군의 방어력은 강화되었다.
 
이로 인하여 중공군의 5월 대공세는 공격 개시 1주일 만에 778고지(Bunker 고지) - '한계, - '풍암리' - '속사리' - '주문진'을 연하는 선에서 일단락되었다.
 
이를 계기로 다시 주도권을 장악한 미 제8군은 중공군이 철수할 기미를 보이자 5월 23일부터 즉시 공세작전으로 전환하였으며, 이 작전에서 미 제10군단은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고 5월 말에는 4월 공세 이전의 '화천'저수지 - '양구' - '원통'선까지 진출하였으며 우인접 한국 육군 제1군단도 '간성'까지 진출하는 등 전군이 Kansas선을 재확보하였다.
 
UN군측은 전쟁 전의 현상을 회복하게 되자 다시 본격적으로 공산측과 휴전협상을 모색하는 한편 군사작전을 Kansas선의 유지를 위한 국지적인 공격작전으로 전환하엿다.
 
이때 미 제8군은 휴전협상 과정에서 Kansas선을 주저항선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그 북방에 비무장지대의 설치와 경계부대를 운용할 공간을 고려하여 현 방어선을 북쪽으로 최소한 32km 추진시켜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중부전선에서는 '철의 삼각지대' 저변에 있는 '철원'과 '김화', 그리고 '금성'분지를 제압할 수 있는 지형을 확보하도록 하였고, 중동부전선에서는 중공군의 전략적 요충지인 '해안분지'를 감제하고 또한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기 위해 Kansas선을 '화천'저수지 - 1304고지(DT 230305) - '산두머리곡산'(DT 373379) - '향로봉'(DT 406423) - '고성'을 연하는 선 (New Kansas선으로 명명)으로 북상, 조정하고 이를 점령하도록 하였다.
 
이 조치에 의거 미 제10군단장 알몬드(Edward M. Almond) 중장은 6월 1일 좌전방 미 해병 제1사단(한국 해병 제1연대 배속)은 '서화리'를 목표로 각각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반면 5월 대공세에서 참패당한 중공군은 겨우 접적만 유지하면서 분산, 철수한 주력부대가 재편성할 시간을 얻기 위하여 '화천저수지' 북 쪽의 '북한강' - '양구' - '원통'을 연하는 고지군에 북한군 제2 및 제5군단을 배치하고 험준한 지형을 이용,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끝까지 고지를 사수하도록 독려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미 해병 제1사단은 최초 '무명도로'(31번)를 중심으로 좌전방에 미 해병 제1연대, 우전방에 미 해병 제5연대를 배치하고 미 해병 제7연대를 '도촌리'(DT 1513), 그리고 한국 해병 제1연대를 '죽리'(DT 1113)에 예비대로 확보한 가운데 항공 및 포병의 화력지원하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미 해병 제1사단의 공격은 5월 하순에 있었던 반격작전 시의 상황과는 양상이 판이하게 달랐다. 북한군은 고지마다 거점진지를 구축하고 완강하게 저항함으로써 초전부터 고전이었고, 또한 우인접 미 육군 제2사단의 공격 역시 같은 상황이었다.
 
미 제10군단장은 작전초기부터 공격이 부진하자 사단 전투지경선을 조정하고 공격부대의 전투 편성도 변경시켰다. 좌전방 '화천저수지' 남 쪽에는 군단 예비대로 있던 한국 육군 제7사단을 투입하고 그 동안 군단 우전방에서 혈전을 벌인 미 제2사단은 그 작전지역 중 '서화리' 계곡 좌측을 좌인접의 미 해병 제1사단에, 그 우측을 동사단에서 배속 해제된 한국 육군 제5사단에 인계함과 동시에 예비대로 전환시켰다.
 
미 해병 제1사단은 이 조치로 사단의 전투 정면이 동 측으로 확장되자 6월 3일 사단작전지역 내에서 가장 험준한 지역으로 진출 중에 북한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많은 전, 사상자가 발생한 미 해병 제5연대를 '서화리'계곡 좌측으로 이동하도록 하고 대신에 이 지역에는 '죽리'에서 예비대로 대기 중인 한국 해병 제1연대를 투입하였다.
 
한국 해병 제1연대는 '화천'저수지 남쪽의 '수리봉'(DT 0619 ) 일대의 진지를 한국 육군 제3연대에 인계하고 '죽리'에 집결한지 이틀 만에 다시 '광치동'(DT 1721)으로 이동하여 미 해병 제5연대의 진지를 인수하게 되었다. 이로써 양구 북동방 '대암산' - '도솔산' - '대우산'을 연결하는 험준한 고지에서 예측불허의 혈전이 펼쳐지게 되었다.

                                    "도솔산 전투" 당시의 해병 제1연대장 김대식 대령(제3대 해병대 사령관)과 그의 휘호
 
한. 미 해병 연대가 진지 교대를 하고 있을 무렵까지도 미 해병 제5연대의 상당수 부상자들이 현지에서 하산을 기다리고 있었고 주변에는 미처 처리하지 못한 피아의 전사자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이런 상황에 의거 짐작하건대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 전투"에서 많은 실전 경험을 쌓은 한국 해병 제1연대라 할지라도 이번 작전이 그리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견할 수 있었다.
 
                                            '도솔산'지역도(강원도 얀구군 해안면 만대리 분지, Punchbowl)

위의 '도솔산' 지역도 중앙에 빨간색 원과 옆에 1951.6.7로 표시된 지점이 목표 #4의 중간목표인 '무명고지'이며 제2중대 3소대가 당일(6월 7일) 20:00사경에 점령하였음.
                                                                        해병 제1연대의 공격목표 상황도
위의 '목표점령도' 중 목표 #4 밑의 빨간 표식(무명고지)이 제2중대 3소대(소대장 이근식 소위)가 공격 2일째인 6월 7일 20:00시경 3회에 걸친 돌격으로 점령한 지점임.
 
미 해병 제1사단으로부터 능선 상에 위치한 크고 작은 24개 고지를 공격목표로 활당받은 한국 해병 제1연대는 좌전방 제1대대에 목표 #1, #2, #4, 및 #7을, 우전방 제2대대에 목표 #8, #9, 및 #10을 각각 부여하고 제3대대를 예비대로 '광치동'에 확보한 가운데 6월 4일 14:00시 공격을 개시하였다.
 
공격부대는 항공 및 포병의 화력지원하에 경미하게 저항하는 북한군을 격멸하고 최초목표인 #1, #8을 쉽게 탈취한 후 공격의 여세를 몰아 목표 #2 및 #9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북한군이 최초목표에서 철수한 병력까지 수용하여 완강하게 저항할 뿐 아니라 일몰로 인하여 공격부대는 공격을 일시 중지하고 목표 #1 및 #8로 철수하여 야간방어로 전환하였다.
 
다음 날(5일) 공격부대는 돌격중대를 교대시킨 후 재공격을 감행하였으나 지형도 감제당하여 불리할 뿐만 아니라 완강한 적의 저항으로 다수의 사, 상자만 내게 되어 공격은 돈좌되었다. 이에 연대장 김대식(제3대 해병대 사령관) 대령은 돌격부대 정면의 적의 전투력을 분산시켜 활로를 타개하기 위하여 예비대인 제3대대를 우측방으로 투입하여 목표 #6, #13, #12 및 #11 순으로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기도 역시 실패하였다. 이때 미 해병 제1사단장 토마스(Gerald C.Thomas) 소장은 사단 전 정면에서 북한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공격이 부진하자 6월 8일 사단 예비대로 '도촌리'에서 대기 중인 미 해병 제7연대(-제3대대 )를 미 해병 제1연대와 한국 해병 제1연대의 전투지경선인 '무명'(31번)도로 축선 상에 투입하였다.
 
이후 한국 해병 제1연대는 목표 #4, #9 및 #13을 탈취하기 위하여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던 중 제7중대 1개 소대가 돌격하여 목표 #9를 점령하기도 하였으나 애석하게도 중대의 주력병력이 증원되기 이전에 적의 역습으로 동고지로 진출한 소대원 10여 명이 전사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도솔산' 지형과적진으로 돌입하는 해병
 
이와 같이 한국 해병 제1연대의 공격은 불운하게도 고비 때마다 잦은 비와 산악 특유의 농무로 인하여 화력지원, 특히 항공지원이 제한되었고 또 유일한 능선접근로를 통한 정면돌파 만 반복함으로써 전사, 상자가 급증함에 따라 공격 의지마저 약화되어 해병들의 사기는 몹시 저하되었다.
 
후일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목표 #4, #9 및 #13을 연하는 선은 북한군 제12사단의 주저항선으로서 적은 1개 연대규모로 동 거점을 고수하기 위하여 진지 전방에는 수많은 지뢰를 매설하였고 또 기암, 괴석의 공간을 이용하여 경기관총을 배치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진지와 진지는 교통호로 연결하고 이 지역을 난공불락의 요쇄진지라고 호언장담하고 있었다.
 
이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해병 제1연대는 6월 10일 오후에 연대장과 연대참모가 동석한 가운데 긴급 작전회의를 개최하여 그 동안의 작전경과와 실패 원인을 면밀히 분석, 검토한 결과 야간공격을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미 해병 제1사단장은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한국 해병 제1연대장의 결의에 찬 집요한 건의에 반신반의하면서 야간작전을 승인하였다. 연대 전 장병들은 야간공격의 승패가 곧 연대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비장한 각오하에 공격준비를 완료하고 6월 11일 02: 00시에 이미 여러 차례 치른 작전으로 눈에 익은 지형을 따라 무조명, 무지원하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공격부대는 예상 외로 적의 큰 저항을 받지 않고 순조롭게 진출하여 공격개시 3시간이 경과할 무렵에는 목표 #4에 이어서 목표 #9 에서 목표 점령을 알리는 신호탄을 새벽 하늘에 쏘아 올렸다. 연대로서는 북한군이 난공불락이라고 호언장담하던 목표 #4, #9 및 #13을 연하는 주저항선 돌파가 이렇게 쉽게 성공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하였다.
 
이때 북한군 제12사단은 그들의 주전술인 야간공격을 해병 제1연대가 사용할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못한 결과 일부 병력만 경계부대로 배치하고 주력은 후방 능선으로 철수 중에 불의의 일격을 받았던 것이다.
 
목표의 점령으로 사기가 충천된 해병 제1연대는 비로서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한 후 전과확대를 위한 추격작전을 실시하여 경미하게 저항하는 북한군을 격퇴하고 목표 #7 및 #10을 점령하였다.
 
6월 12일에는 우전방 제3대대만 계속 공격을 재개하여 목표 #12, #11 및 #14를 점령하였고, 제9중대 1개 소대는 목표 #15인 '대암산'으로 진출한 우인접 미 해병 제5연대와 연결함으로써 새로운 Kansas선 내의 16개 목표를 완전히 점령하고 13일 작전을 일단락지었다. 연대는 즉시 방어로 전환하여 제1대대를 목표 #2, #4 및 #7에, 제2대대를 목표 #9 및 #10에, 그리고 제3대대를 목표 #11 및 #14에 각각 배치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한편 북한군 제12사단은 해병 제1연대의 끈질긴 공격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주저항선에서 철수하여 '도솔산' 일대에 축차진지를 편성하고 진지보강에 주력하고 있었다. 이 무렵 연대의 우인접에서 새로운 Kansas선으로 진출한 미 해병 제1연대장 브라운 (Brown) 대령이 동 연대의 방어선이 북한군의 주요 거점인 757고지(DT 109254)에서 감제되고 있으므로 주저항선을 3~4km 북상시킬 것을 건의하였다. 미 해병 제1사단장은 이 건의를 검토한 결과 미 해병 제1연대 전방의 757고지와 한국 해병 제1연대 전방의 '도솔산'을 연하는 Brown(후일 New Kansas선에 포함됨)선을 설정하고 이 선을 점령하도록 하였다.
 
이 명령에 의거 한국 해병 제1연대 제2대대는 6월 15일 08:00시 목표 #17, #18 및 #19를 향해 공격을 개시하여 산발적으로 저항하는 적을 격퇴하고 목표를 점령 후 적의 역습에 대비하여 진지강화와 정찰활동에 주력함으로써 "도솔산 공격"의 발판을 확보하였다. 이어서 제3대대가 "도솔산 공격"을 준비하고 있을 때 대대를 방문한 김대식 연대장은 지난 6월 초부터 감행된 이 전투를 이번에 공격할 고지의 이름을 따서"도솔산 전투"라고 명명한다고 하여 당면한 전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대대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제3대대가 6월 17일 08:00시에 공격을 개시하자 북한군은 대대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무수한 박격포를 사격하며 완강히 저항하였다. 그러나 대대는 이에 굴하지 않고 두더지 처럼 교통호를 파면서 적진에 접근한 후 야간공격을 감행하여 6월 19일 새벽 '도솔산'을 점령하였다.
 
제3대대가 중앙에서 주변고지를 감제할 수 있는 '도솔산'을 확보하자 맨 마지막으로 공격준비를 완료하고 명령만 기다리던 제1대대가 6월 19일 08:00시 제3대대의 엄호하에 '도솔산' 좌측방으로 뻗은 능선상의 목표 #23을 공격하여 점령한 후 이미 목표 #24로 진출해 있는 미 해병 제7연대와 연결하고 동 고지를 인수함으로써 해병 제1연대는 작전 개시 16일 만에 '해안분지'를 남쪽에서 감제, 관측할 수 있는 '도솔산' 일대의 고지군을 확보하였다.
 
이 무렵 한국전쟁 발발 1주년을 맞이하여 그 동안 UN군측의 여러차례에 걸친 평화제의를 거부해 온 중공군측이 소련 외상 말리크(Malik)를 통해 휴전을 제안해 옴으로써 협상개시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전장은 7월 초까지 소강상태로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 기간 중 북한군은 밤만 되면 소규모 부대를 침투시켜 주저항선에 대한 탐색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때 목표 #24를 방어 중이었던 제3중대는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한 때 주저항선의 일부가 점령당하는 위기 상황을 맞기도 하였으나 포병의 화력지원과 우인접 제2중대와 협조된 공격을 펼쳐 이들을 격퇴하였다.
 
이때 UN군측도 휴전협상이 열리기 전에 방어선을 엄호할 수 있는 중요한 정찰기지를 확보하기 위한 작전을 펴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미 제10군단장은 예하 사단에 Kansas선 전방에 설정된 정찰한계선인 Badger선내에 강력한 정찰기지를 설치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명령에 따라 해병 제1연대는 눈 위의 혹처럼 연대의 작전지역을 감제, 관측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해안분지'를 서쪽에서 통제할 수 있는 '대우산'을 공격목표로 결정하였다.
 
해병 제1연대는 7월 8일 10:00시에 공격준비 사격을 실시한 후 제5, 제7, 및 제10중대로 혼성편성된 공격부대를 제2대대장의 지휘하에 공격을 개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공격부대가 적진으로 진출할 수록 적의 박격포 사격을 동반한 저항은 예상외로 완강하였고 특히 진지 전방에서는 발을 옮길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지뢰가 매설되어 있어 전진이 지연됨은 물론, 이로 인한 사상자가 급증하였다. 설상가상으로 기상의 악화로 항공기 및 포병의 화력지원마저 여의치 못하여 공격은 돈좌되었다.
 
후일 밝혀진 바에 의하면, 연대 정면의 북한군 제5군단은 해병 제1연대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받고 재편성이 불가피한 북한군 제12사단을 7월 초순의 소강상태를 틈타 예비대로 전환시키고 대신 부대 정비를 완료한 그들의 제32사단을 '대우산' 일대에 투입하고 진지를 보강하기 위해 수많은 지뢰를 매설하였다.
"도솔산 전투" 후 해병 제1연대로 현지를 방문하신 이승만 대통령과 김대식 연대장(철모)사진 우측부터:손원일 해군 참모총장, 무치오 미국 대사, 밴프리트 미 제8군 사령관(연대장 뒤)
                                   "도솔산 전투" 후 현지(해병 제1연대)를 방문하신 이승만 대통령께서 내리신 휘호.
 
해병 제1연대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이번에는 제1대대를 투입하여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완강히 저항하는 적을 공격하였으나 '대우산'과 주저항선 사이에 위치한 1100고지와 1001고지를 연하는 선에서 공격이 저지되었다.
 
연대가 재공격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인 7월 10일 해병 제1연대의 상황을 지켜본 미 해병 제1사단장은, 불굴의 공격 정신으로 무장된 한국 해병 제1연대라 할찌라도 적의 저항이 완강한데에다가 또한 연대가 그 동안 혈전을 펼쳐 지쳐있으므로 계속 공격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차후작전을 위해 일단 공격을 중지하고 현 위치에서 방어에 주력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명령에 의거 한국 해병 제1연대는 '도솔산'을 중심으로 한 주저항선의 진지보강과 전방지역에 대한 정찰활동을 계속하였다.

이와 같이 정찰기지 확보작전이 부진하자 미 제10군단장은 7월 15일에 지난 6월부터 '양구' 북방에서 북한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펼친 미 해병 제1사단을 군단예비대로 있던 미 제2사단과 교대시켰다. 이에 따라 그 동안 미 해병 제1사단에 배속되어 연대 창설 이후 가장 치열한 혈전을 치른 한국 해병 제1연대도 용맹한 해병의 피의 대가로 얻은 '도솔산' 방어지역을 미 제2사단에 인계하고 '홍천' 북방의 '북창'(DS 1282) 부근으로 이동하여 부대정비와 교육훈련에 주력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1. 海兵戰鬪史 "第一輯"(海兵隊司令部)
              2. 韓國戰爭 戰鬪史 "兜率山戰鬪"(國防軍史硏究所)
 
oldmarine
 
And

서부전선의 해병대

|

서부전선의 해병대

 1952. 3. 17-1953. 7. 27 

We gave up the ground, but we may well have saved the war.                               

          - 미해병 제1사단의 "장진호 전투" 중에서 -   

해병 제1연대 배치도(장단 및 사천강지역) 

위의 전투상황도는 해병 제1연대가 중동부전선으로부터 1952년 3월 17일 서부전선(경기 장단 및 사천강 지역)으로 이동 후의 최초 부대 배치도이며 우일선대대에 제1대대, 좌일선대대에 제3대대 그리고 연대예비대인 제2대대는 좌일선대대의 후방에 위치하고 있음. 우일선대대의 전방 우측에 '67m 고지'가 위치하고 있으며 그 남쪽(아래)에 '36m고지' 그리고 바로 남쪽에 '39m고지', '33m고지', 및 '31m고지' 순으로 위치하고 있음. 좌일선대대의 전방에 '87m고지'가 위치하고 있으며 고지 앞을 '사천강'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있음.
위에 보이는 강은 '임진강'이 남쪽(한강)으로 흐르고 있음을 보여주며 오른쪽 윗부분에 '통일교'와 그 밑으로 '자유의 다리'가 보이고 있음. 남북으로 그어진 황색선은 DMZ를 표시하며 동쪽(오른쪽)은 아군지역, 서쪽(왼쪽)지역은 북한군지역으로 되어 있음.'사천강'은 사진의 왼쪽부분(황색선의 서쪽)에 북에서 남('임진강')으로 흐르고 있음.


'도라산'은 사진의 오른쪽 윗부분에 진한 갈색으로 보이는 부분(산)이며 '도라산'의 하록을 통과하는 '경의선'을 중심하여 우측에 1개 지역 좌측에 2개 지역으로 나눠져 보이는 구릉(낮은 고지) 같은 지역일대에 우일선대대의 5개 전초가위치하고 있었음. '사천강'은 사진의 좌측에서 북에서 남(한강)으로 흐르고 있음.

이 전초진지 일대에서 이 나라의 수많은 젊은이들, 해병들이 대한민국을 위하여 그들의 청춘과 목숨을 희생했다는 사실을 우리, 대한민국 국민은 일순간도 잊어서는 안된다.
    오른 쪽에 '임진강'이 북에서 남(한강)으로 흐르고 있으며 강 중간에 '임진가'철교가 보이고 있음.

본 내용은 1951년 초부터 중동부전선(강원도)의 산악지대에서 혹한과 싸우며 북한군과 전투 중에 있던 우리, 해병 제1연대(연대장 김동하 대령 부연대장 공정식 중령)는 중동부전선에서 1952년 3월 17일 미해병 제1사단의 작전 통제하에 수도서울의 관문인 서부전선(장단, 사천강지역)으로 이동 후 휴전 시(1953년 7월 27일)까지의 기간 중 '사천강'변을 연하는 7개 전초진지를 지형의 절대 열세 속에서 운영하면서 중공군의 '인해 전술'에 대항하여 혈전을 벌였다.

서부전선으로 이동 직후(3월 25일) 김석범 대령(준장에서 임시계급)이 연대장으로 부임했으며 남상휘 중령(제1대대장)이 부연대장으로 보임되고 제1대대장에 부대대장인 함덕창 소령이 임명되었다. 좌일선대대는 최초 제3대대(대대장 안창관 소령)가 배치되었으며 다음에 제2대대(대대장 박성철 소령)가 배치되었다.

1년 4개 월에 걸친 전투에서 우리해병들은 2개 사단의 중공군을 분쇄했으나 유리한 지형을 이용한 그들의 전술과 '인해 전술'로 인하여 결국 우일선대대의 '155m고지'의 2km 전방에 위치하고 있고 전초진지 중 가장 높은 요지인 '67m고지' 및 4개 전초진지와 좌일선대대 전방 4km에 위치하고 있는 '사천강'변의 요지인 '87m고지' 및 50m고지' 등에서의 전투로 776명의 전사, 3214명의 전상자를 내고 '장단, 사천강'지역 일대(전초진지)를 적에게 내어주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 해병 제1전투단(10월 1일부로 전투단으로 승격 전투단장 김성은 대령)은 중공군의 유리한 지형을 이용한 집요한 파상공격(인해 전술)에 많은 희생자를 냈지만 그들의 주요 전략목표였던 '임진강'철교를 확보함으로서 전술적으로는 전초진지일대를 상실했으나 전략적으로는 해병 제1전투단은 '임진강' 철교를 확보함으로써 승리한 전투였다.  

당시 필자는 중동부전선에서 소총소대장(해병 제1연대 제1대대 제2중대 3소대장)으로 5개 전투에 참가했으며 서부전선에서는 좌일선대대였던 제2대대 제5중대장을 4개 월간 한 바있다. 특히 "도솔산 전투"에서는 2일 간 공격 중대에 많은 희생자를 내게했던 연대 목표 #4의 중간 목표인 '무명고지'를 AR사수와 둘이서 점령하여 미국정부로부터 Silver Star Medal을 수여받았다. 

필자는 '도솔산 전투' 중의 부상으로 진해 해군병원에서 1개월 간 입원 치료 후 다시 출동하여 중동부전선에서는 4.2" 중포중대 선임장교였으며 서부전선으로 이동 후 계속 4.2" 중포중대 선임장교, 소총중대장(제2대대 제5중대장), 또한 전투단 작전보좌관 및 제1대대 중화기 중대장을 했기 때문에 서부전선에서의 각종 전투 현황에 대하여 누구보다 정확하고 많은 경험과 지식을 갖고 있으며 또한 당시의 실상도 생생하게 아직 기억하고 있다.

필자는 이런 경험과 지식에 근거하여 우리, 해병 제1전투단의 전투경과를 통하여 숫적 절대우세 속에서, 병력 및 유리한 지형 조건 등을 갖추고 있던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과연 우리는 전술적으로, 또 전략적으로 이 전투를 승리했는가? 그렇지 않으면 패배했는가? 즉 어떠한 위치에 있었던가하는 것 등, 그 내용을 우리의 후세대를 위하여 우리의 세대(한국전 참전자)가 끝나기 전에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은 오래 전의 전투라하여 잊혀진 전쟁(Foggoten War)으로 흔히들 말하지만 우리, 노 병들은 아직껏 그 전투의 실상을 어제 일처럼 잊지 않고 똑 똑히 기억하고 있다. 

人命在天 

oldmarine

And
prev | 1 | next